주변의 많은 응원 속에 첫 단편집을 내게 되었다.
막상 책이 나올 때가 되니, 왜 이리 부끄럽고 후회가 되는지 모르겠다.
주변에서 나름 재밌다고 우쭈쭈 해 주니, 정신 못 차리고 기고만장하는 꼴 같다.
그래도 어쩌랴. 이 부끄러움도, 후회도, 내 인생의 단편이며 서사인 것을.
소설은 재미있어야 한다는 생각은 어려서부터 변함이 없다.
여기서 재미란,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독서를 마쳤을 때, 마음에 이는 작은 파문 하나.
당신이 그것을 느낄 수만 있다면, 나의 글은 세상에 나올 이유를 찾은 것이다.
어쩌면, 앞으로도 계속 글을 쓰고 책을 내고 싶다는, 미친 갈망을 이어 갈지도 모른다.
나의 글이 당신을 만나길 희망한다.
나의 마음이 당신의 마음에 가닿기를 희망한다.
_작가의 말 中
다양한 눈,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한 독창적 시각이 특징
관여된 개체의 수만큼, 각기 다른 시각으로 파고드는 힘 충만
소설가 김덕기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화자(話者)의 다양성’이다. 문학작품의 시점(視點)과 시각(視角)의 각도를 설정하는 일은 창작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누구의 눈으로 어떻게 바라보며 이야기를 끌고 갈 것인가 하는 것은 작품의 주제와도 깊숙이 연관된다. 창작인들은 다 알 듯이 그런 결정은 결코 간단한 일이 아니다.
김덕기 작가는 삶을 바라보는 입체적인 시각을 풍부하게 소유한 소설가다. 대개 작가들은 주인공이거나 이해 당사자의 눈으로 자초지종을 다루는 정공 기법을 선택한다. 그렇게 시작하는 것이 이야기를 끌고 나가기가 수월하고, 스토리 흐름 형성도 자연스럽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작가는 그런 평범함이나 안일을 거부한다. 한 사건을 서술하거나 묘사하는 일에 있어서 얼마나 다양한 시선이 존재하는지를 정확하게 체득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능력은 소설가가 지닌 최대의 무기가 될 수 있다.
제3, 제4의 눈과 입을 빌려서 에피소드를 끌고 가는 작법(作法)은 전통적인(또는 가장 흔한) 접근 방식에 비해 몇 배의 공력이 더 들어간다. 소위 가슴을 옮겨 앉아 사고하는 능력이 탁월하지 않고서는 좀처럼 개연성을 확보하기가 어렵다. 김덕기 소설이 발칙한 실험적 접근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설득력을 확보한다는 것은 작가로서 대단한 수준의 내공을 확보하고 있다는 뜻이다. 세상의 일이란 그 어떤 것이든 그 상황에 관여된 개체의 수만큼, 또는 그 이상으로 다양한 시각이 존재한다. 그 다양한 관점을 큰 감각으로 인식하고 화자 선택의 폭을 넓히는 일에 주저하지 않는 용기야말로 김덕기 문학의 범상치 않은 저력일 것이다.
책 속으로
- 나, 민이 오빠를 좋아하게 된 것 같아!
스탠드 뒤쪽의 소란스러운 아이들 틈에 서서 눈물을 훔치던 조지가, 쉬어 버린 목으로 외친 고백을 들은 것은 나뿐인 것 같았다. 빈틈없던 조지의 느닷없는 사랑 고백뿐만 아니라, 언제부터 조민을 오빠라고 칭했는지, 조민의 역주가 눈물을 자아낼 만큼 조지에게 감동스러웠는지, 목이 쉬어 터질 정도로 응원해야 했는지 등등 그 모든 것이 의아하고 당혹스러웠다. 아마도 의자 사건 때부터였겠지. 상대적으로 내가 조지를 위한 그 어떤 용기도 내지 못했던 사건 말이다. 나는 조지의 대범한 사랑 고백을 놀려 주려는 마음이 채 들기도 전에 의욕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저 모래가 가득 들어찬 스탠드 바닥에 조용히 쪼그려 앉고 말았다.
_「빈집」 25~26p
- 촬영할 때 실제로 성욕을 느끼는지 묻고 싶은 건 아니고요?
그녀가 조금 더 걸어가 계단에 털썩 엉덩이를 붙인다. 손수건을 꺼내어 바닥에 깔 것을 권유했지만 그녀가 손사래를 쳤다. 가방에서 담뱃갑을 꺼내어 개중 한 대를 입에 물었다. 난 그런 뜻으로 질문한 게 아니었다고 변명하려다 그만두었다. 그녀에게 변명은 통하지 않는다. 그리고 질문엔 실제로 그런 뜻이 내포돼 있었다. 난 그저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었을 뿐이다.
- 목이 너무 아프지요.
좋아 죽겠다는 듯 콧소리가 녹아든 신음을 세 시간 내내 질러 대는 것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럼 남자 배우는 그저 좋아 죽느냐? 많게는 열 명 가까이 되는 스태프들이 쳐다보는 앞에서 자연스럽게 물고 빨고 하다가 성행위를 하는 장면을 촬영하는 것이 쉽지 않다. 가슴 위로 남자 배우의 땀방울이 뚝뚝 떨어질 땐 그저 안쓰럽기만 하다.
그녀가 엉덩이를 툭툭 털고는 일어섰다. 그러고는 시내를 한눈에 품어 보려는 것처럼 한 바퀴 휘 둘러보았다.
- 당연히 여배우도 느껴야죠. 사랑하는 장면이잖아요.
_「제이라」 60~61p
C는 한 시간 전에 I에게 신나 한 통을 쥐여 주었다. 이 고시원에 늘 너를 힘들게 하고 괴롭히라고 명령을 내리는 노인이 203호에 살고 있다. 그를 없애야지만 네가 편해질 수 있을 거야. 이 신나 한 통을 모두 쏟아 버린 후 성냥에 불만 붙여 주면 다 끝나는 거야.
C는 I의 손을 보았다. 의외로 깔끔하다. 손에 들려 준 신나 통은 마개를 따지도 않은 채 그대로였다. 그러고 보니, 불길에서 탈출한 사람들과 달리, I의 옷과 몸 어디에도 숯 검댕 하나 찾아 볼 수가 없다. 얘가 대체 불은 어떻게 낸 거지?
그때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동요한다. 또 한 구의 시신이 발견된 것이다. 하얀 천에 덮여 구급차에 실리던 시신의 손가락이 조명에 반짝인다. 제법 알이 굵은 반지였다. 반지를 보자 C는 아들이 생각났다. 서울 친구네 집 어디선가 공부에 매진하고 있을 아들. 아무래도 전화 한 통 넣어 봐야겠다. 고생하는데 고기라도 실컷 먹게 해 줘야지.
_「블루 크리스마스」 111~112p
TV에서는 긴급 속보, breaking news라며 하루 종일 관련 보도가 재생되었다. 내가 의식을 잃고 쓰러졌던 경찰서 로비에 소녀가 서 있었다. 목과 팔에 깁스를 했고, 안경과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지만 그녀였다. 우물 속을 막대기로 헤집어 놓아 흙탕물이 넘쳐 오를 것만 같은 회색빛 눈동자.
「… 붙박이장에서는 망치와 손도끼, 일명 빠루라 불리는 쇠지레, 줄톱 등 범행에 쓰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도구들이 발견되었습니다. 화장실에서도 피해자들의 것으로 보이는 증거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욕실 타일 사이에는 피해자들의 혈흔이 말라서 굳어 있었고, 배수관에는 머리카락 및 체모 등이 한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경찰은 범인이 교복을 입은 상태에서 도움을 요청하는 방식으로 피해자들의 저항감을 없앤 후 집 안까지 유인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_「소녀와 살인마」 139p
갑판으로 나왔을 때, 저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배에 오르는 것이 보였다. 선장이다. 기관장이다. 갑판장이다. 선장은 팬티만 걸친 채 그 희고 가녀린 다리를 서둘러 해경의 배에 올려놓고 있는 중이었다. 이 야비한 새끼. 두 번째 겪는 똑같은 상황이지만 분노는 전혀 반감되지 않았다. 순간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었다. 난 내 몸 같지 않은 몸을 이끌고 선장실로 향했다. 해경이라고 쓰인 헬기는 재난 투어 관광 상품이라도 개발했는지 줄곧 배 주위를 파리 떼처럼 날며 구경만 했다. 선장과 그 일당들을 태운 해경의 배는, 자칫 침몰하는 선체와 함께 빨려 들어갈 것이 걱정되었는지 배를 멀찌감치 뒤로 물리었다. 저 멀리서 작은 배들이 쏜살같이 다가왔다. 인근 주민들의 어선이었다.
- 그냥 손을 놔요. 우리가 다 받아줄게.
쓰러진 선체의 옆구리까지 배를 댄 주민들은 필사적으로 승객들을 끌어올리고 실어 날랐다.
간신히 도착한 선장실은 텅 비어 있었다. 난 붙박이로 된 선장의 의자를 지지대 삼아 앞으로 나아갔다. 방송 장비를 켜고 마이크를 부여잡았다.
- 모두 선실에서 나오세요! 밖으로 나오세요! 배의 가장 높은 곳으로 올라오세요!
전원이 들어와 있는 것은 다행이었다. 한바탕 외침이 휩쓸고 간 뒤 선체는, 바다는, 이곳은 고요했다. 방송을 못 들은 것인지, 나올 수 없는 상황인 것인지, 아니면 이미…….
_「살아내 주렴」 188~189p
작가의 말
- 소설가가 되고 싶었다
빈집
제이라
블루 크리스마스
소녀와 살인마
증명
살아내 주렴
굴레
자기사용설명서
작품해설:
세상을 바라보는 입체적 시각 풍부하게 발휘된 실험정신 가득한 작품들
- 안휘(소설가·시인·문학평론가)